
22. 왜 우리는 비교하며 불행해지는가 — 욕망의 철학과 신앙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켠다.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떠났고, 누군가는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친구의 자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직장 동료는 승진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사업이 잘된다는 소식을 전한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화면을 몇 번 넘기다 보면 이상한 감정이 생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조금 전까지 괜찮았던 내 삶이 갑자기 초라해 보인다. 만족했던 집이 좁아 보이고, 잘 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낡아 보인다.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이 어느 순간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진다.
내 삶에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다. 비교할 사람이 등장했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싶어서 갖고 싶고, 내가 성공하고 싶어서 성공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랑스 사상가 르네 지라르는 이 생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지라르의 ‘모방적 욕망(mimetic desire)’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면서 그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지라르는 욕망의 선택이 대상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매개된다고 설명했다.
가령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물건이 유명인이 사용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갖고 싶어진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직책도 친구가 승진하면 욕망의 대상이 된다. 특정 지역의 아파트, 명문대 진학, 자동차, 여행지, 명품도 비슷하다.
그래서 욕망에는 흔히 세 존재가 등장한다.
‘나’가 있고, ‘내가 원하는 대상’이 있으며, 그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타인’이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타인이 가진 것을 나도 원하게 되면 타인은 더 이상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는 나의 기준이 되고 경쟁자가 된다.
친구가 좋은 집을 사면 축하하면서도 내 집을 바라본다. 동료가 승진하면 기뻐하면서도 내 위치를 계산한다. 누군가 자녀의 성공을 이야기하면 집으로 돌아와 내 자녀와 비교한다.
비교는 매우 조용하게 우리의 관계를 바꾼다.
“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나는 뒤처졌다”는 판단으로 바뀐다.
여기에는 중요한 착각이 숨어 있다.
타인의 성공이 반드시 나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교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행복도 상대평가가 된다.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SNS는 이런 비교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실패와 지루한 일상보다는 성공, 여행, 좋은 음식, 성취처럼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선택해서 올린다. 2023년 체계적 문헌고찰은 SNS상의 사회적 비교·질투·우울 증상 사이에 연관성이 나타났다고 정리했다. 다만 연구자들은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기존의 우울감이 비교 행동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2026년 발표된 54개 독립 표본, 3만6583명을 종합한 메타분석에서도 SNS에서의 ‘상향 비교’는 평균적으로 낮은 자존감·안녕감, 그리고 높은 불안·우울 및 부정적 사회평가 감정과 연관됐다. 그러나 연구진 역시 개인과 상황에 따른 차이가 크며 이것만으로 보편적인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문제를 단순히 “SNS를 보면 불행해진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비교하는 인간에게는 이상한 역설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만족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비교 대상이 등장한다.
작은 집에 살 때는 조금 더 큰 집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큰 집을 얻고 나면 더 좋은 지역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직장에서 한 단계 승진하면 만족할 것 같았지만, 승진하고 나면 더 높은 자리가 보인다.
욕망에는 결승선이 없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불행은 단순히 ‘부족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부족해서 괴로운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 필요가 충족된 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결핍을 느낀다.
여기서 철학과 신앙은 만난다.
성경 역시 인간의 욕망 자체를 단순히 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먹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욕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문제는 욕망의 방향과 주인이다.
내 욕망을 내가 성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공의 기준을 내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더 큰 집,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인정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나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욕망에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오해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자족’이다.
자족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기 쉽다. 현실에 불만을 갖지 말고 주어진 형편에 무조건 순응하라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현실에 대한 무기력과는 다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궁핍과 풍부함을 모두 경험했으며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즉 자족은 처음부터 주어진 성격이 아니라 삶 속에서 훈련되고 형성되는 태도로 묘사된다.
이 점은 중요하다.
만족은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는 상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도 지금의 삶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성공을 나의 실패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다.
자족은 “이 정도면 됐어”라고 삶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더 가져야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에 가깝다.
그래서 신앙에서 만족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내 가치가 재산, 직책, 학벌, 자녀의 성취, 사회적 인정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교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비교가 나를 지배하는 힘은 약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비교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장 오래된 신앙의 대답 가운데 하나가 ‘감사’다.
그러나 감사 역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감사는 불행한 현실을 좋은 현실이라고 자기암시하는 일이 아니다. 불의와 가난과 차별을 보고도 “감사해야 한다”며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감사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감사는 없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비교는 나에게 없는 것을 보여준다.
감사는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보여준다.
비교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감사는 나의 삶으로 돌아오게 한다.
비교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못할까?”라고 묻지만, 감사는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래서 감사는 단순한 긍정적 감정이 아니다. 욕망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는 영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행복의 조건을 추가하며 살아왔다.
집을 사면 행복할 것이다.
승진하면 행복할 것이다.
자녀가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조건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조건이 생긴다.
행복은 계속 미래로 연기된다.
그 사이 오늘의 삶은 행복을 준비하는 대기실이 되어 버린다.
신앙은 이 끝없는 연기를 멈추게 한다.
“언젠가 충분히 가지면 감사하겠다”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감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에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이 있다.
비교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은 때로 좋은 자극이 되고 성장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사회적 비교 연구에서도 상향 비교가 언제나 부정적인 결과만 만드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감탄과 동기부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비교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비교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보다 앞서 있다고 해서 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내가 가난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더 많은 박수를 받는다고 해서 내 삶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욕망의 철학과 신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같다.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가 아니다.
“나는 왜 그것을 원하는가?”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욕망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어야 한다.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깊은 관계를, 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더 의미 있는 삶을,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욕망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신앙의 성숙은 욕망이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다.
욕망이 바뀌는 과정이다.
타인이 가진 것을 욕망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발견하고, 경쟁자를 바라보던 사람이 이웃을 바라보고, 부족한 것만 헤아리던 사람이 이미 받은 것을 헤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화면을 끄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지금 내가 부러워하는 그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원하기 때문에 나도 원하게 된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다면 비교는 성찰이 된다.
그리고 성찰 끝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감사는 더 이상 예의 바른 종교적 표현이 아니다.
감사는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나의 삶을 되찾는 자유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