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현 신앙에세이(1)] 마침표인 줄 알았던 시간 : 멈춘 것 같았던 계절, 다시 흐르기 시작한 삶

마침표인 줄 알았던 시간, 쉼표로 남은 15년

심리학과 음악의 만남, 상처가 치유의 선율이 되기까지

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지금은 ‘준비’의 시간

이미지 출처 :  Gemini 

 

“아버지, 왜 하려고 할 때는 환경을 다 막으시고, 막상 하라고 하실 때는 길을 열어주시지 않아요?
아버지가 책임지세요. 저는 모르겠어요.”


꽉 막힌 강남대로 한복판, 차 안에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원망이라기보다는,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기도라 하기엔 지나치게 솔직했고, 신앙이라 하기엔 몹시 절박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이런 시간을 만난다.
분명히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길이 막힌 것처럼 느껴질 때. 붙들고 있던 재능마저 짐처럼 느껴질 때.


당신의 인생 시계는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 있을까. 혹시 모든 것이 멈춘 자정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은 아닐까.


내 삶은 다섯 살, 처음 피아노를 배우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간은 내 꿈이 아니라, 어머니의 바람을 대신 살아낸 시간에 가까웠다.
스물두 살,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으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나는 음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피아노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멈췄다.
교회 반주자의 자리도, 학원 운영과 개인 레슨으로 이어지던 시간도 사라졌다.
피아노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하루하루가 막막하게 흘러갔다.


20대 후반부터 반복되던 대상포진, 손가락의 관절염과 신경통은 결국 건반 위에서 내 손을 완전히 떼어놓게 만들었다.
그렇게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만 해도, 
내 음악 인생은 완전히 마침표를 찍은 줄 알았다.


이 시간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울며 되뇌던 질문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왜 피아노가 싫다던 사람에게 전공을 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손대지 못하게 하십니까.”


답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의 권유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중독과 트라우마를 배우며 타인의 아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묻혀 있던 음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필수 과정이었던 영성 수련회에서 누군가를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20년 만에 다시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했다. 
누군가의 요청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연주였다.  
기쁨도 있었지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더 컸다.


현실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었고, 다시 학원을 운영해야 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때 들은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부활하려면, 죽을 듯이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죽어야 해요.”


조급함을 내려놓는 것.
내 계획을 내려놓는 것.
내 시간표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내가 통과해야 할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여전히 겨울을 지나고 있다.
봄이 오기 전 가장 차가운 시간처럼, 이 시간도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고백했던 “음악으로 사람을 살리겠습니다”라는 말은 지금도 나를 붙들고 있다.


큰 변화는 아직 없다. 그러나 삶의 악보가 다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분명하다. 
마침표인 줄 알았던 시간은 쉼표였고, 나를 다시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혹시 당신도 꿈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자리에 서 있는가.
모든 것이 멈췄다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가.


그 자리가 정말 끝일까.
아니면,
당신을 다시 빚기 위한 조용한 준비의 시간은 아닐까.


당신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리고 그 시간을,
당신은 어떻게 지나고 있는가.

 

 

작성 2026.02.04 18:01 수정 2026.02.0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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